믿음과 순종을 혼동하면 망한다

 

권증현 목회강단

은혜의 강, 생수의 강으로 ……

염소망목사 (. 염동권)저 말숨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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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순종을 잘못 이해하면 영혼이 망합니다. 과거 중세 때부터 알미니안 주의니 칼빈주의니 지금까지 끝도 없이 이 충돌은 진정될 기세를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냐 하면 성경을 교리적 혹은 지식적으로만 풀이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문제로 들어가면 주님의 말씀을 지식적인 혹은 교리적으로 풀이한다는 것 자체가 오판입니 주님의 말씀은 말씀 그 자체로 풀고, 주님께서 다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 먼저 행위 믿음이란 성경에 없습니다. 행위는 주님과의 동행 없이 스스로 하는 것이기에 행위라는 글자 다음에 믿음이란 글을 붙이면 안 됩니다. 그냥 행위 믿음이 아니라 행위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구원론과 차별화 하기 위해 행위론을 붙인듯합니다. 또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이 말도 틀립니다.

믿음으로만 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으로 가 정답입니다. 믿음은 관념적으로 머릿속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성령을 받지 아니한 분들은 이 개념을 오해합니다. 그러니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논쟁만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줄기에 접붙임 당해 성령을 받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면 이런 문제는 한방에 정리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진짜 믿음이란 것이 생기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성령님의 인도함과 능력대로의 이끄심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 순종이 바로 행위라는 능동형(내 의지)이 아닌 수동형(성령님의 의지)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예전에는 그렇게 하기 싫고 귀찮은 믿음적인 일들이 주님께 강한 빛으로 한방 두둘겨 맞고 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함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즐거움이 가미된 적극적으로 변하더란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할 때 시간을 정해놓고 율법적으로 하던 것이 시도 때도 없이 시간만 나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란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를 중심에 놓고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것들이 이제는 나보다 성령님을 내 생각의 중심에 놓고 나는 주변으로 밀려나더란 것입니다.

예전에는 남을 돕고 싶은 마음만 있고 실천은 안 하던 것이 이제는 실천 안 하면 잠이 안 올 정도로 심장이 뜁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던 성경 속의 말씀이 이제는 물 흐르듯 줄줄 가슴속으로 파고듭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이 각박한 인생의 여정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영원한 본향에서 신랑을 만나는 신부대기소로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억지로 포장하여 흉내만 내던 성령의 9가지 성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나를 장악하고 그 습성대로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되고 있더란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니 제 자랑이 되었는데 남을 빗대어 함부로 판단해 글을 쓸 수 없으니 부득불 저를 빗대어 한 소리이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와같이 접붙임으로 인한 성령님을 영접전과 후가 확연하게 다름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분들은 누구에게 배우거나 듣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알게 됩니다. , 이건 교리가 아닙니다.

가장 설명하기 간단한 원리는 성령님의 임재로 믿게 하시니까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의지대로 행해지(순종)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작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순간이 아니고, 진짜 살아계신 성령님이 나의 영과 연합되는 게 믿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입교식 때 하는 사영리 영접 식은 진정한 영접이 아닙니다. 그냥 그것은 입교식의 한 과정적인 행사일 뿐입니다. 교회 입교식 때 하는 영접 식은 성령님과 상관없는 지식적인 인식으로 시키는 대로 내가 그냥 입으로 독백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입교식의 몇 마디 주고받기식 문답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순간, 진짜 성령님을 받고픈 갈급함은 사라집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그 영접식에 인용되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사도바울이 말한 이 말씀의 본질은 진짜 성령님을 받은 성도가 영으로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내가 고백하는 게 아니고 성령님이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하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19:2)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당시 교인들이 당연히 성령을 받아 믿음 생활 하는 것으로 알고 물은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 영의 비췸을 받아서 영적으로 체질이 바뀌었기에 자신에 빗대어 다른 교인들도 받았겠지 하고 좋게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뭔지도 모른다고 하니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성령을 받고 제대로 믿음 생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시작입니다.

성령님과 연합되면 진짜 영적 믿음이 시작되고, 성령님의 인도 하므로 체질이 바뀌어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순종하도록 성령께서 체질을 바꾼 것입니다. 성령님과 연합되었으니 체질이 바뀔 수밖에 없지요. 마치 우유에 어떤 효소를 넣으면 우유가 요플레로 변하듯 성령님이라는 효소가 내 영과 연합되면 요플레 같은 영으로 변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유만 많이 갖다 놓고, 우유인 상태로는 아무리 지식적으로 흔들고 지지고 볶고 해봐야 절대 우유는 요플레로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의 혼례식 집에 들러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보이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터치하니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리 물동이에 물(지식)만 많이 붜봐야 예수님의 역사가 아니면 절대 포도주로 바뀌지 않습니다.

, 성령님을 받아 내 안에서 내 영과 연합되지 않으면 아무 변화 없는 지식적이고 관념적인 껍데기 믿음만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성령님과의 연합으로 우유에서 요플레로,

물에서 포도주로 변하는 것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원리이고 구원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님과의 접붙임 없이는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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