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영 목사 ’내가 만난 하나님’ 간증 염소망목사 옮김

【권증현 목회강단 】

은혜의 강, 생수의 강으로 ……

염소망목사(구. 염동권) 저 말숨 선교회 대표

 

교회력으로 보자면, 오늘이 고난주간의 극치인 성(聖) 금요일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 금요일과 부활의 아침을 기념하여왔다.

그리고 교회는 계속해서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고 설교해 왔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다.

 

  1. 고난의 신비로 다가오신 하나님.

하나님의 품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무참히 죽으시다니 이런 황당한 얘기가 어디 있을까? 하나님이 저주스러운 죽음을 친히 경험하시다니 이런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금요일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 대속제물(代贖祭物)이 되시기로 절대 예정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돌아가셨다가 3일 후인 주일날에 부활하심으로, 그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사실이 확증(確證)되었다고 신약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한일서 4장 10절)

말하자면 세상의 구원은 힘을 쓰는 주먹으로 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남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받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고난 받는 종의 형태로 온다고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구약성경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53장)를 비롯하여 수많은 말씀으로 줄곧 예언하여 왔었는데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어졌고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식이요 하나님의 진리라고 선포하였다.

요한복음 19장 5절에 나오는 라틴어 어구,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어느덧 고난받는 사람들의 표상(表象)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는 중세 후기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비적 해석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스도교 예술에서도 중요성을 띠었다. 그 후부터 ‘에케호모 (Ecce Homo)’ 상은 그리스도를 “슬픔의 인간상” 또는 “불쌍한 인간상”의 표본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수백만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나약한 어린아이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을 가리켜서 “지금 저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있다!” 라고 어린아이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신앙고백까지 생겨났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재조명했는데, 세상 성(世上 性)이 주는 고난의 깊이와 이를 고난의 신비로 승리하는 희망의 하나님을 설교한다.

 

2.박보영 목사는 세상 죄 때문에 고난받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과 동일시(同一視)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아 보인다.

그것은 그 무슨 대중 영웅 심리나 고고한 수도승의 깨달음이 가져온 철학적인 결과물도 아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을 본받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고자 소원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몰라준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신앙의 단순성을 어떻게 그렇게 시종일관 유지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에 감히 한 점 흠도 없고 죄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고난을 당하시고 죽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 때문에 나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셨는데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 그것이 그를 강하게 일으켜 세워 주었던 것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교회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없다고 굳게 믿고 살아왔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무지막지한 죄 때문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 역시 세상 죄의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 였다. 반대급부 적으로 세상길로 나간 그는 의사가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데 성공했지만 세상 유혹은 더 깊은 영혼의 상처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어떠어떠한 이유로 이혼까지 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다니던 외동아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그를 신유(神癒)의 손길로 고쳐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 그는 새로운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다. 이런 극적인 회심과 하나님의 부르심의 순간(Turning Point)은 그의 삶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반전 드라마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출가(出家)했다. 어린 아들도 포기했고 애써 벌었던 수십억 재산도 당장 쓸 돈 20만원만 남기고 개척교회나 기도원, 불우한 이웃에 다 나누어 주었다. 장차 고난의 여정을 통해서 이루어야 드려야 할 하나님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의도적으로 제거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이하고도 과감한 결단은 보통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그 어떤 말씀이 있었던 것 같다.

 

2.그는 종교적 천재인가? 아니면 종교적 바보인가?

나는 그의 삶의 단편적인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나의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았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묵상하고 또 묵상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초지일관(初志一貫) 하는 그의 결단력과 인내심 그리고 인생을 달관(達觀)하는 경지와 하나님 신앙의 깊이는 도대체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박보영 목사 그 한 사람의 얘기로 끝낼 수 없는 영적인 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나 자신도 풀고 가야만 하는 문제인데 여전히 나 자신은 무기력하고 무능하기만 하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 하다가는 가랑이 찢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환각제를 먹고 마약에 취해서 칼을 들고 도둑질하러 들어왔던 비행 청소년들에게 자기의 배를 찌르라고 들이대면서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너희는 용서받을 죄인인데 우리 예수 믿고 용서받자”라고 복음을 전했다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도둑질하는 떠돌이 청소년들, 더러운 술주정뱅이, 버려진 노숙자들을 데려다가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밥을 해주고 섬기는 삶을 살다니, 그것도 이런 헌신봉사를 알아주기는커녕 병신 도라이 라고 비웃고 모욕하고 뒤에서 걷어차서 나뒹굴어 지기가 다반사였다니 이런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혹시 그는 그 어떤 죄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병적인 자학(自虐) 증세를 보이는 정신병자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는 가출한 어느 여자아이를 돌보아 주었는데 그 아이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언론에 공개되어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수모도 당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후일 진범이 붙잡히고 진실이 밝혀짐으로써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膾炙)되고 있는 유명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는 그 여자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인고(忍苦)의 세월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는데 끝까지 잘 견디며 인내했다니 이런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처음 부르심을 받던 날, “내가 네 병을 고쳐주고 너를 들어 쓰리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13년 동안 단 한 번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의 음성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중지되고 그것도 13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다면 우리 같으면 심각한 회의감이나 의심에 방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박 목사는 전혀 달랐다. 그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고, 믿음을 지켰고, 고난의 삶을 자청해서 받았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수시로 말씀을 의심하고 말씀을 저버리기를 그렇게 자주하는 나 자신을 볼 때 한없이 부끄러운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처음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인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의 삶은 결코 그 어떤 말이나 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함께 살고 있는 비행청소년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모습에 심각한 고민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쇠파이프를 그들에게 주면서 “너희들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다 내 죄 때문이니 나를 죽도록 때려라. 시시하게 때리면 내가 너희를 때릴 것이다.” 라고 했다. 그들은 처음에 농담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단 한 번도 매를 때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다시는 너희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목사님을 때릴 수 없으니 한 번만 봐달라 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나 결국 울면서 때려야 했고 무려 80대를 끝까지 다 맞았는데 엉덩이 꼬리뼈를 잘못 맞아 지금까지도 후유증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참을 수가 있는가? 왜 그렇게 의도적으로 얻어터지고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러나 놀라운 기적이 여기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꼬꾸라져 울면서 회개했고 변화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화(聖化)되어지는 기적적인 변화가 근본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품도 변화되고 행동도 변화되어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영적인 변화가 혁명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어느 성도가 이런 말을 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차라리 어느 특정한 순간에 단 한 번의 고통으로 끝나는 순교 같은 것은 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매일 매일 지속되는 순간순간마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이런 일은 정말 어렵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고민이다…..”

그러나 박 목사님의 삶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다. 냄새나는 옛사람 박 목사가 죽어 없어지고 성령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백지 위임한 상태라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이한 신앙체험을 하게 된다.

추운 겨울날, 술이 취해서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고래고래 욕설하고 소리 지르고 있던 어떤 노인을 긍휼히 여기고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입혀드리면서 “하나님, 우리 할아버지 제가 만난 그 하나님을 좀 만나게 해주셔서 이렇게 고생하고 살지 않게 해주세요. 얼어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해 드렸다.

그런데 이를 기점으로 그의 사역에는 중대한 변화가 오게 되었다. 13년 만에 끊어진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그 성령님의 음성에 의지해서 전혀 새로운 사역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코트를 벗어드린 그날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내 종아, 내가 다 봤다” 말씀하시면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장면을 다시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다 잊어버렸어요. 그 뭐 대단한 거예요. 추운 분이 있어서 옷을 벗어드린 것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 우리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거예요.

“고맙다”리고 하셨어요. 버러지 같은 저요. 늘 잠깐만 틈만 나면은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주인도 모르게 벌써 가서 죄 가운데 가 있고 늘 하나님 앞에 정말 말도 못하는 죄인인데 이 더러운 죄인을 주님은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여러 가지 말씀을 제게 이렇게 저렇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감당하지 못할 말씀이에요. 저는 설교도 못해요.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제가 그렇게 설교를 잘 합니까? 어눌하고 저는 제 마음에 있는 것도 상대방에게 표현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설교할 줄도 모르고 남 앞에서 기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고요. 또 저는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은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는 거 에요. “내 종아, 네가 나를 지켜주었으니, 이제 내가 너를 세워 주겠다…..”

 

3.나는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0-14)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대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다는 성경 말씀을 내게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 사람을 보라!’는 신앙고백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의 말씀대로 그가 전하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말씀이 되게 해주셨고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로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백한 결과물들을 가져오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셨다.

“네가 얼마 안가서 죽으리라!” 하면 그가 말한 대로 그는 반드시 죽었다. “네가 살리라!” 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변경해서라도 그를 살려주셨다.

세상의 일반적인 보편타당한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목회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은 심령 자체가 근본에서 변화되기 시작했고 예수님처럼 점차적으로 성화(聖化)되어 갔다. 사회에서 버려진 노숙자, 도둑, 깡패, 부랑아들도 성품이 천사처럼 변하고 인격도 바뀌어 마침내 새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20명이 넘는 아이들하고 같이 생활하고 있고 아이들 가운데 일반대학을 비롯하여 감신대, 한신대 등 3개 신학대학을 10명이나 다니고 있다. 신학생 가운데 어느 명문 대학교도 합격할 수 있는 전국 석차 최상위권 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학생도 발굴했는데 그 학생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주의 종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다. 이런 모든 영적인 변화는 그 어떤 달콤한 말이나 유익한 교훈을 통해서 되어 진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의 고난의 십자가를 몸소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실천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기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오늘의 썩어문드러진 타락한 교회 모습에 진실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오늘의 개척교회가 겪는 재정적인 고난의 아픔을 어떻게 해서든 함께 풀어가고자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3월 6일, 인천 방주교회 성도들이 주변의 다른 작은 교회에 나가 줄 것을 부탁했다.

개척교회 지원 방안으로 주일날에 자기 교회 문을 닫아걸고 교인들을 개척교회로 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도록 한 세계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한 달이면 한 달,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아예 작은 교회에 붙박이 신자가 되는 것은 더 훌륭한 일이라고도 했다. 방문하는 작은 교회에 등록해서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해서 재정적인 도움을 주고, 어려운 교회를 맡고 있는 올바른 목회자에게 힘이 되어 주라는 것이다. 자신도

  1. 스트라디 바리우스 같은 영혼의 울림.

악기의 여왕으로 불리는 바이올린은 사람 목소리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계의 3대 명품 바이올린으로는 스트라디 바리우스, 과르네리, 아마티를 꼽는데 그 중에서 아마티의 수제자 ‘안토니오 스트라디 바리(1644-1737년)’가 제작한 ‘스트라디 바리우스’는 최고 명품 중의 명품 이라고 한다.

그가 평생에 만들었다는 650여개의 스트라디 바리우스가 세계 곳곳에 돌아다니는데 그 가운데 최고급 연주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1715년경에 제작된 불과 30여개 정도다. 그 가격은 무려 172억- 20억 원을 호가하는데 이는 희소가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스트라디 바리우스가 뿜어내는 높은 음량과 아름답고 예리한 음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최고의 선율과 풍성한 울림은 그 스트라디 바리우스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스트라디 바리우스라는 특별한 악기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시간의 역사가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바이올린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 재질이 어떤 것이냐가 또한 중요하다고 한다. 스트라디 바리우스는 앞판과 옆판은 소나무로 만들었고 뒤판은 단풍나무로 만들었는데 추운날씨에서 천천히 자란 오래된 나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야 밀도가 낮고 탄성은 높으며 여기서 특별하고도 기기묘묘한 아름다운 음색을 뿜어내는 것이다.

나는 박보영 목사님의 삶과 신앙을 대하면서 최고 명품 스트라디 바리우스를 연상한다. 그의 숱한 고난으로 빚어진 영혼은 마치 바이올린의 울림통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전달하는 아주 귀하고 보배로운 영혼의 울림통 아닌가 한다.

우리는 싸구려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고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피로 얻어진 가장 값비싼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내 몫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영적으로 비밀한 영의 세계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나사렛 예수!

하나님 같은 사람, 사람 같은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죄로 사형 받았고,

그가 했던 제자 교육의 핵심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게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만 할 수 있는 말을 하고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처럼 죽고 하나님처럼 부활하여

제자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믿게 하였고

그렇게 전하게 하였고 그것을 전하다 죽게 했고,

하나님만 줄 수 있는 새 삶을 주었고,

역사를 A.D와 B.C로 바꾸어 놓았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Yes 라고 말해주십시오.

Yes 라는 말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부활절 영광의 아침을 기다리며.

당신의 성공과 행복을 응원 합니다

“잘 되리라”

사)글로벌희망나눔 권증현 kwon90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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